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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ine

영화 버닝을 보고

 

오랜만에 긴 영화 감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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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체가 스포일러입니다.

2. 당연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3. 새벽에 일찍 일어나 쓴 것이므로 아직 다 정리된 글을 아닙니다.

4. 한 번 본 영화이기 때문에 디테일이나 대사가 틀리거나 생략되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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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세 젊은이의 이야기다. 삶의 의미를 찾는 혜미, 삶의 재미를 찾는 벤, 그리고 스스로 더럽고 쓸모없다고 여기는 종수. 그러니 어쩌면 이 시대 모든 젊은이들의 이야기일 수 있다.

 

종수는 문예창작과를 나왔지만 꿈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다. 소설을 준비한다고 하지만 그에게 소설을 쓸 시간조차 사치로 느껴진다. 그런 그에게 우연히 다가온 혜미는, 혜미의 말처럼 혜미에 방에서 - 둘이 섹스를 할 때 종수가 보는 운이 좋으면 하루에 한 번 N타워에 반사되어 보이는 햇살 같은 존재이다. 혜미는 우연히 만난 종수에게 몸도 마음도 모두 주는 존재다. 종수의 자위가 늘 혜미의 방 창가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종수는 그 햇살에서 성적 욕망만이 아니라 희망에 대한 욕망도 꿈꿨을지 모른다.

 

혜미는 삶의 의미를 찾는 그레이트 헝거(Great hunger: 칼라하리 사막의 부시맨들 가운데 의미에 굶주린 자를 의미)이다. 혜미는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어렵게 모아둔 어쩌면 빚을 지고 돈을 갖고 아프리카로 떠난다. 아프리카에서 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사라지겠구나라고 생각했다며 펑펑 우는 혜미에게 삶은 죽음의 두려움만큼 두렵다. 혜미에게 종수는 어렵고 힘들었던 옛날을 아름답거나 잔인하게 기억하는 도구이자, 과거와 연결된 유일한 인물이다.

 

이 둘 앞에 나타난 벤은 매우 부유한 미지의 인간이다. 그는 직업이 뭐냐는 종수의 질문에 요새는 노는 것이 직업이 된다는 모호한 말만 남긴다. 강남에 넓은 빌라에 살고, 포르쉐를 몰며, 딱히 하는 일이 없어 보이는 벤은, 삶의 재미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반대로 말하면 그는 어떠한 것에도 재미를 찾지 못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가 혜미를 만나는 이유는 흥미롭기 때문즉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벤은 그 부유함 때문에라도 종수(는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와 혜미, 모두에게 선망의 대상이다. 특히 혜미는 벤을 통해 현실의 비루함을 잊고자 한다.

 

셋은 만나면서 갈등한다. 종수는 가까워진 벤과 혜미에게 질투와 증오를 느낀다. 하지만 혜미를 놓친 것은 자신이다. 첫 만남에서 자신과 벤 사이에서 망설이는 혜미를 벤에게 보낸 것은 종수이기 때문이다. 종수는 그 자리에서 자신과 벤을 인간과 인간이 아니라 낡은 화물차와 포르쉐로 놓고 비교한다. 그러면서도 벤과 가까워진 혜미를 벤의 돈에 흥미를 느끼는 속물정도로 생각하는 것도 종수 자신이다.

 

벤은 혜미에게 두 달자리 관심을 갖는다. 그에게 혜미는 흥미로운존재이다. 하지만 그 흥미는 오래가지 않는다. 아주 어릴 때 이후 울어 본 적이 없다는 벤은 어쩌면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는 혜미를 알게 된지 두 달 쯤 되는 시점의 어느 모임에서 모두가 관심 있게 보는 혜미의 춤을 보며 하품을 한다. 이제 혜미에 대한 흥미가 끝난 것이다.

 

셋의 본심은 종수의 허름한 집에서 대마초와 함께 드러난다. 종수는 벤에게 혜미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혜미에게는 창녀 같다고 소리친다. 혜미는 음악에 맞춰 옷을 벗고 그레이트 헝거의 춤을 춤으로서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몸부림을 보여준다. 벤은 쓸모없고 더러운, 그리고 우리나라에는 너무나 많이 버려져 있는 비닐하우스를 불태우며 삶의 재미를 찾는다고 고백한다.

 

영화는 여기서 다시 시작한다. 종수는 이때 쓸모없고 더러운 비닐하우스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묻는다. “쓸모없고 더럽다는 것은 형이 결정하는 거에요?” 벤은 대답한다. “비가 내리는 것처럼 그냥 자연스러운 것(정확한 대사는 기억나지 않는다)”이라고. 그리고 이제 태울 때가 왔으며, 곧 종수 주변의 가까운 비닐하우스를 태울 것이라고 예고한다. ‘쓸모없고 더러운 비닐하우스를 자신이라고 느낀 종수는 동네에 쓸모없고 더러운 비닐하우스라고 여겨지는 모든 비닐하우스를 매일 돌며 감시하지만 어떤 비닐하우스도 불타지 않았다. 그리고 이때 쯤 혜미와 연락이 끊긴다.

 

혜미를 찾기 위해 벤을 미행하다, 벤과 마주한 종수는 벤에게 비닐하우스에 대해 묻는다. 벤은 이미 태웠다고 말한다. 종수가 자신의 집 근처 어떤 비닐하우스도 불타지 않았다고 말하자 벤은 너무 가까워서 모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한 명은 공간적 거리를, 한 명은 관계의 거리를 말하는 것을 이즈음부터 영화는 암시한다.

 

종수는 이때부터 삶의 의미가 혜미를 찾는 것에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아지 집착한다. 벤을 미행하는 것은 종수의 일상이 된다. 벤도 그것을 모르는 것 같진 않지만, 그렇다고 피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종수에게 자신이 재미를 찾는 지점을 가리켜 주려는 듯 보인다. 그것마저 벤에겐 일종의 게임일 뿐이다. 결국 종수는 벤이 혜미를 죽였음을 확신하고, 자신 역시 벤을 죽이고 그와 그의 차를 불태우며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에서 재밌게 등장하는 것은 담배와 대마초이다. 담배는 종수와 혜미의 것이다. 그들은 현실을 이야기할 때 담배를 피운다. 첫 만남에서도, 벤의 집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셋 모두가 본심을 드러내는 순간은 대마초를 피는 환각의 순간뿐이다.

또 하나는 고양이인 보일이다. 혜미의 작은 자취방에서는 소리도 없던, 그래서 사라지는 사료와, 배설물만으로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던 보일이는 넓은 벤의 집에서는 너무나 쉽게 나타나고, 도망친다. 좁은 혜미의 자취방이 그저 먹고 배설하는 공간이어서 숨고 싶은 공간이었다면, 넓은 벤의 집은 자신을 드러내도 되는 공간이라고 생각했을까? 하지만 문이 열리자 도망감으로서 어디도 소속 될 수 없는 존재임을 보여주기도 한다.

 

한편 종수는 스스로를 쓸모없고 더러운 비닐하우스라 여겼지만 벤이 쓸모없고 더러운 비닐하우스로 생각한 것은 혜미였다. 벤 입장에서는 종수도 쓸모없고 더러운 비닐하우스여겨질만 했지만, 그의 집 화장실 전리품 보관소에서 확인할 수 있듯 벤에게 쓸모없고 더러운 비닐하우스는 모두 여성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여성혐오의 정서와도 맞닿아 있다.

 

셋은 모두 스스로를 불태웠다. 셋은 모두 본인의 추구하는 것을 남에게서 얻으려 했다. 벤은 삶의 재미를 흥미를 느끼는 여성과의 관계를 통해 얻으려 했다. 혜미는 종수와 벤 사이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 했다. 스스로를 쓸모없고 더러운 비닐하우스라고 규정지은 종수 역시 혜미를 찾는 것으로 자신의 의미를 규정지었다. 사회 안에서 라는 존재는 남에 의해서 규정 될 수밖에 없지만, 결국 스스로에게 나는 나만이 결정할 수 있다.

 

상대적 박탈감. 낮은 자존감. 삶에 대한 허무. 희뿌연 미래, 운이 좋으면 볼 수 도 있는 희망. 모두 지금 젊은이들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 암울한 영화는 답 없이 마침으로서, 그 답을 찾아야 하는 것은 영화를 보는 모든 이들 각자의 몫이라고 이야기 한다.

 

#버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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