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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ine

캐롤(다수의 스포가 있음)

캐롤

 

이 영화는 극적인 반전, 빠른 전개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피하는 것이 좋다. 대신 작은 떨림, 옅은 파장, 작은 변화를 찾는 사람이라면 강력히 추천한다(전자가 저열하고 후자가 훌륭하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캐롤과 테레즈는 모든 면에서 다르다. 캐롤은 태어나면서부터 부유한 사람처럼 보이고, 테레즈는 빈곤하진 않지만 부유함은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으로 보인다. 캐롤을 모피코트를 걸치고 백화점에 나타나 비싼 신형 기차 장남감을 아무렇지 않게 사는 사람이고, 테레즈는 백화점 경영진의 선물인 산타 모자를 억지로 쓴 종업원이다. 둘 사이의 이런 사회적 관계(계급적 차이)는 이 둘의 첫 만남을 수평적일 수 없게 만든다.

 

이들의 수직적인 관계는 둘 사이의 행동에서도 나타난다. 캐롤은 고급식당에서 메뉴판도 보지 않고 음식을 주민하는 사람이고, 테레즈는 메뉴판에서 음식을 고를 수 없어 메뉴판을 보지 않는 사람이다. 심지어 테레즈는 캐롤의 집에 손님으로 갔지만 자연스럽게 차()를 준비하고, 캐롤을 그것을 신경쓰지 않는다. 심지어 트루즈는 시키지도 않은 담배 심부름을 자처하기도 한다. 이들의 관계는 수평적이지 않다.

 

성 정체성이란 부분에서도 이들의 관계는 수평적일 수 없다.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잘 알고 있는 - 심지어 그것 때문에 이혼 소송을 준비하는 - 캐롤과 달리, 테레즈에게 동성애는 두렵고, 낯선, 하지만 강렬하게 끌리는 어떤 것이다. 확신을 갖고 접근하는 캐롤과, 불안과 혼란 속에서 캐롤을 받아드리는 테레즈의 관계는 수평적일 수 없다.

 

하지만 테레즈의 용감한 선택 이후 이들의 관계는 수평적으로 변화한다(테레즈의 선택에 용감한이란 수사를 붙인 것은 영화가 다루는 시대가 1950대 이기 때문이다). 테레즈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니 이해하려 하지 않는 남성들에게 과감히 이별을 고한다. 남자들의 행위가 별로 여서 이별을 고한 것인지,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이별을 한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냥 자신을 찾는 과정이었는지, 이성애자 남성인 내 입장에서 100% 이해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테레즈는 선택 이후 망설이지 않는다. 테레즈는 같이 여행을 가자는 캐롤을 제안을 망설임 없이 받아 드렸고, 먼저 한 방을 쓰자고 제안했다. 잠자리로 먼저 유혹한 것도 테레즈다. 물론 이후 혼란을 맞이하긴 하지만, 그것은 캐롤과의 관계 때문이 아니라, 자신 때문에 캐롤이 위태로운 처지에 놓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흥미로운 하나는 캐롤과 테레즈의 초창기의 모습이다. 이들의 사회적 지위의 차이는 꼭 남녀관계가 아니더라도 연인 사이에 권력관계가 계급에 의해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이들의 권력 관계는 서로에 대한 이해와 사랑으로 곧 무너지지만 말이다. 아무튼 영화는 권력의 문제가 사회 계급의 문제, 혹은 시스템의 문제라는 점을 보여준다.

 

계속 테레즈의 이야기를 했지만, 캐롤 역시 용감하고 과감했다. 캐롤은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딸의 양육권을 포기하면서까지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는다. 딸보다 테레즈를 더 사랑해서가 아니다. 캐롤의 선택은 자신이 행복하지 않으면 세상 무엇도 행복할 수 없다는 선언과도 같았다. 내 행복은 남이 결정해 주는 것이 아니다.

 

캐롤은 메시지뿐만 아니라 영상도 훌륭하다. 캐롤의 집에 가는 차 안에서 테레즈의 몽환적이고 혼란스러운 시선은 그 자체로 테레즈의 혼란스러운 내면을 보여준다. 그리고 - 내가 본 것이 맞다면 - 처음 캐롤과 테레즈가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 보이는 미묘한 시선의 높이 차이는 마지막 식당 장면에선 수평적으로 바뀐다. 이런 세심한 차이는 둘의 관계 변화를 보여주는 또 다른 장치이기도 하다.

 

세상의 미묘한 권력관계, 동성애, 사랑, 성장, ‘캐롤은 한 편의 영화에, 아름다운 영상으로 이 모든 이야기를 너무나 세심하게 녹여냈다. 다시 한 번 보고 싶은 영화다.

 

 

. 이 영화를 극장이 검사외전과 쿵푸팬더에게 점령당해 못볼 뻔 했다고 생각하니 아직도 화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