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소에 들어왔다. 쉬려고 보니 빨래가 밀렸다. 이 게스트하우스에는 세탁기가 따로 없었다. 대신 근처에 빨래방을 이용해야 했다. 빨래를 들고 숙소를 나왔다. 비가 아직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피렌체는 나에게 화창한 하늘을 선물하지 않았다. 빨래방을 처음 이용해서 어떻게 할 줄 몰라 헤매는데 한 청년이 와서 도와줬다. 알고 보니 그는 이런 빨래방을 여러 곳 돌아다니며 자판기를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에게 세탁기 사용법을 – 마치 처음 세탁기를 사용한 사람과 같은 자세로 – 배웠다. 그는 더욱 친절하게 – 혹은 자신의 매상에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 – 건조기 사용법까지 알려주고야 자리를 떠났다. 그의 도움으로 세탁기를 돌리고 숙소로 돌아갔다.
잠시 쉬다 세탁이 끝날 시간에 맞춰 다시 빨래방으로 갔다. 아까는 아무도 없던 빨래방에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아저씨 한 명이 앉아 있었다. 난 다된 빨래를 꺼내어 이번엔 건조기에 넣었다. 건조 시간은 세탁시간 보다 훨씬 짧았기 때문에 숙소를 다시 들어오기엔 시간이 아까웠다. 난 결국 빨래방에 앉아서 건조시간을 기다리기로 했다. 좁은 공간에서 50대 중반 아저씨와의 어색한 동거 – 어쩌면 나 혼자만 그렇게 느낄 – 가 시작된 것이다.
나는 힐끔 힐끔 - 대 놓고 볼 자신은 없으니 - 그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주 초라한 행색은 아니었지만 – 하긴 빨래방에서 빨래를 할 정도이니 – 그렇다고 아주 깔끔한 차림을 한 것도 아니었다. 파마를 한 것 같진 않으니 약간 헝클어진 흰색 곱슬머리에 오래 된 듯 보이는 남색 자켓을 입고 있었다. 자켓은 오래되었지만 그와 꽤 잘 어울렸다. 다른 옷차림도 대부분 그랬다. 오래 됐지만 잘 어울리는.. 이러면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펴게 된다.
저 사람은 원래 잘 나가던 회사원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한때 잘 나가던 예술가였을지도 모르지. 행복한 가정도 꾸렸겠지. 아름다운 아내와 사랑스런 아이들로 집은 늘 북적였을거고. 그러던 어느 날 그 일이 생긴거야. 불황으로 인한 정리해고. 예술가였다면 갑자기 불황으로 작품이 팔리지 않기 시작했겠지. 뭐 망상이니까. 아무튼 점차 생활은 어려워 졌을 것이고, 아내와의 불화도 시작됐겠지. 예민한 그는 그걸 참지 못했을 것이고. 아이들과도 멀어졌을 거야. 결국 술로 스스로를 달래게 되었고...
이렇게 작위적이다 못해 저열하고 지루한 상상을 하는데, 그가 술병을 꺼내 들었다. ‘헉! 내 예상이...’ 라는 생각이 잠시 머릿속을 스쳤다. 그는 술을 마시며 날 쳐다봤다. 나에게 ‘이봐 자네도 같이 한잔 하지’라고 말할까봐 겁이 덜컥 났지만 그는 술병을 들고 나에게 웃음음 보일 뿐이었다. 역시 이럴 땐 어색한 웃음밖엔 방법이 없다. 나 역시 어색하게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나쁜 사람은 아니구나’라는 생각과, ‘만약 여자 였다면 이 상황이 매우 무서웠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숨 막히는 시간이 지속되려던 순간 지나가던 행인이 날 구원했다. 그는 그 아저씨와 오랜 친구인 듯 말을 걸었고, 그는 나에게는 허락하지 않던 술을 어디서 꺼냈는지 잔을 하나 꺼내어 행인에게 건내며 대화를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건조도 끝났다. 난 빨래를 챙겨 숙소로 돌아갔다.
돌아와 생각해보니 덜컥 외로웠다. 그와 그 행인이 웃으며 대화하는 모습이 그제야 떠올랐기 때문이다. 늘 그 빨래방에서 빨래를 하는 그와, 그 길을 지나다니는 그 행인에게, 그렇게 일상을 살고 있는 그들에게 나야 말로 경계해야할 이방인이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과, 직장, 그리고 그것들과 함께하는 일상이 처음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여행은 아무리 좋아도 여행일 뿐이고, 여행객은 항상 이방인일 뿐이다. 낯설음은 설렘을 주지만 편안함을 주지 못한다. 일상에서 설렘을 찾기 힘든 것처럼. 어느덧 피렌체의 마지막 밤이 되었고, 여행도 막바지를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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