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거버넌스라는 용어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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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버먼트에서 거버넌스로
1970년대 말부터 시작된 복지 국가의 위기와 1990년대 이후의 정보화·세계화·지방화 등의 사회 변화 과정에서 거버넌스governance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거버먼트와 달리 거버넌스는 정부가 일방적으로 주도하지 않고 정부와 시민 사회가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거버넌스는 ‘(키를) 조종하다’를 뜻하는 그리스어 Kubernan에서 왔다. 거버먼트와 유사하게 사용되었으나 독일의 정차학자 칼 도이치Karl w. Deutshcht가 ‘키잡이 수로 안내인’ 등을 뜻하는 그리스어 Kubernetics에서 나온 사이버네틱스를 정치에 적용해 거버넌스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즉 정부가 혼자 키를 잡지 않고 시민 사회와 키를 나눠 잡는 역할 분담을 통해 정부와 시민 사회의 관계를 수직적이고 위계적인 형태가 아니라 보다 수평적인 파트너 관계 또는 네트워크 관계로 운영하려는 것을 뜻한다.
거버넌스 개념의 등장 배경인 복지 국가의 위기는 세 가지 원인에서 비롯되었다. 첫째는 복지 국가의 재정 위기이다. 한때 장밋빛 미래를 보장하는 듯했던 서유럽의 복지국가들은 자본이 국외로 빠져나가고 출산율이 낮아지면서 인구 감소 등이 원인이 되어 심각한 재정 위기를 겪었고, 점치 기존의 복지 정책을 집행할 재원을 마련하지 못하게 되었다. 더 적은 비용으로 더 효율적으로 적절한 곳에 사회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려는 의도가 거버넌스의 출현을 자극했다.
둘째는 대의 민주주의의 위기이다. 미국이나 유럽의 안정된 정당체제는 역설적으로 잦은 부패와 정치적 무관심, 새로운 사회 변화 전략에 대한 무관심 등을 불러왔다. 한국만이 아니라 서구 사회에서도 투표율의 하락은 일반적인 현상이며 정치 부패 스캔들도 끊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국가가 복지라는 이름으로 시민들의 세밀한 일상까지 간섭하고 통제해서 시민 사회의 자발성과 자율성을 해쳤다(하버마스가 생활 세계의 식민화‘라고 부른 현상이다). 결국 복지국가의 위기는 국가와 시민 사회 모두의 능력을 약화시켰다. 이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국가는 자신의 권한과 책임을 나누고 공동으로 문제 해결을 모색하는 과정으로 거버넌스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했다.
거버넌스 등장의 또 다른 배경은 인터넷을 비롯한 정보화다. 정보화는 국가와 시민 사회가 쌍방으로 소통할 수 있는 물리적 조건을 마련했다. 정보의 내용과 그 형식을 분리해 정보를 쉽게 복사·편집·가공할 수 있게 되면서 정보의 빠른 확산이 가능해졌다. 게다가 컴퓨터뿐만 아니라 비디오텍스, 화상 전송 시스템 같은 새로운 미디어들이 기존의 사회적 관계를 변화시켰고 정보화 사회는 이전 사회의 시·공간 장벽을 허물고 새로운 시공간 감각을 만들어냈다. 이런 환경에서 스스로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가공하며 판단을 내리고 그 판단을 다른 이들과 공유하려는 시민들의 수가 늘어났다. 이러한 공유의 흐름이 인터넷 커뮤니티 내에서 소통되고 뭉쳐지면서 하나의 지적 흐름을 형성했다. 이제 시민들은 정부가 문제 해결자를 자처하며 나설 때까지 무조건 기다리지 않는다. 참여 문화는 거버넌스의 출현을 자극했다.
또한 세계화는 각 국가가 혼자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 예를 들어 전 세계적인 생태계 파괴나 기후 변화, 이주 노동과 같은 문제를 다루려면 새로운 논의 구조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시켰다. 그리고 유엔 차원의 인도주의적 개입이나 초국적 기업의 막강한 영향력은 이전의 국가 주권 개념을 변화시켰고, 국경을 가로질러 확장하는 정치·경제·사회 활동이 늘어나면서 외부의 사건이 개인이나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력도 커지고 있다. 즉 세계화는 국가만이 아니라 공동체와 개인의 생활을 바꾸고 있다. 더 이상 고립된 섬은 존재할 수 없고 세계화라는 흐름 속에서 정부와 시민 사회가 함께 전망을 세워야 한다는 압박이 더해졌다.
지방화는 세계화란 조건과 맞물린 개념이다. 지방화는 국가가 다루기엔 미시적인 문제들, 가령 마을 어디에 공원을 만들고 누구에게 얼마만큼의 복지 혜택을 제공할 것인지와 같은 문제들을 지방 정부에게 전적으로 위임하도록 했다. 동시에 단순한 문제 해결만이 아니라 자치 역량의 강화라는 과제를 중요한 화두로 제시했다. 시민들 스스로 해결 가능한 문제에 국가가 개입하는 건 비효율적이므로 지역민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과정을 마련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확산되었다.
세계화와 지방화로 국가는 전 지구적 문제를 해결하기엔 작고 마을의 문제를 해결하기엔 너무 큰 존재가 되어버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거버넌스 개념이 대두되면서 사회적 합의나 연대 등이 새로운 원리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2000년대 이후에는 생태계 변화, 사회 복지, 효율적 행정 체계, 기업의 사회적 책임 등 다양한 분야에 거버넌스 개념이 적용되었으며 지속 가능성sustainability 개념과 결합되기 시작했다.
거버넌스에서 문제 해결의 주체는 정부와 시민 사회다. 어느 하나가 앞서는 게 아니라 둘의 공동 노력이다. 함께 정책을 만들고 집행하며 평가한다. 그런 과정이 없으면 거버넌스가 아니다. 그렇다면 거버넌스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기존의 사업이 법이나 규칙을 따른다면 거버넌스는 공동의 노력이므로 협약, 협의, 관행을 따른다. 정부와 시민 사회가 같이 약속하고 의논하며 하나의 문화를 만들어 가는 것이 거버넌스이다.
그러므로 거버넌스의 내용에는 제한이 없다. 정부가 맡은 대부분의 사업들이 거버넌스의 대상일 수 있고, 거버넌스는 그 사업들을 근본적으로 재배치하고 재구상하는 역할을 맡는다. 복지 사업을 예로 들자면, 거버먼트에서는 정부가 예산을 책정하고 공무원들을 통해 사업을 진행했지만, 거버넌스에서는 정부와 시민 사회가 사업을 함께 구상하고 정부 예산만이 아니라 시민의 자발적인 활동을 통해 사업이 진행된다. 궁극적으로 거버넌스는 시민 사회의 자치와 정부/시민 사회의 협치를 지향하고 공공성을 실현하는 국가 구조의 전환을 의미한다. 이것은 초기의 야경국가 이론이 근본적으로 실패했음을, 또한 복지 국가가 지속 가능하지 않음을 뜻한다.
하승우, <<공공성>>, 책세상, 44-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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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의 의견이 모두 옳다고 볼 수는 없으나, 일단 하나의 정리된 견해라는 측면에서.. 거버넌스에 관심 있는 분들은 읽어 보세요. 전 내용을 잘 몰라 거버넌스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는데, 읽다보니 사용 안한 것이 다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