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agine

경기도 하남시 풍산동 199-1

beatles 2016. 1. 17. 12:50

경기도 하남시 풍산동 199-1번지.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20년 넘게 살던 집의 주소다. 그 전의 집은 걸어서 1분도 안 되는 거리에 있었고 사글세였다. 내 뚜렷한 기억이 남아 있는 첫 집은 그 사글세집이다. 방은 두 개였는데, 한 방에는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사셨고, 우리 네 식구는 나머지 한 방에서 살았다. 당시 우리집은 작은 구멍가게를 했고, 방은 가게에 딸려 있는 작은 방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리 어렸다고 해도 어떻게 네 식구가 살았을까 싶지만, 당시에는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할머니는 그 집에서 돌아가셨다.

 

풍산동 199-1번지로 집을 사서 이사했다. 당시가 1989년이니, 우리 부모님이 결혼하고 10년이 더 지나서의 일이다. 우리는 여전히 구멍가게와 식당을 겸하는 집을 했다. 전보다 식당이 커졌다. 테이블은 4~5개 정도. 방은 두 개였다. 한 방은 부모님이, 한 방은 나와 동생이 썼다. 화장실은 집 밖으로 나가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가야 했는데, 밤에 화장실 가는 것이 어린 나이에는 무섭고 겁이 났다.

 

그 자리에 다시 집을 지은 것은 1996년쯤이다. 내가 중3이 되는 해이기도 했고, 동생이 초등학교 6학년이 되는 해이기도 했다. 부모님은 곧 고등학생이 되는 아들과, 중학생이 되는 딸이 한 방에서 지내는 것을 안타까워했고, 곧 그동안 모은 돈을 털어 그 자리에 집을 지었다. 그리고 그러던 도중 찾아온 IMF는 우리집을 한번 휘청하게 하기도 했다. 그리고 아직 어렸던 나는 처음으로 내 방을 갖게 된 그 날을 잊을 수 없다. 지하에는 창고가 있었고, 일층은 가게와 식당, 2층은 집, 3층은 옥탑이 있었다. 물론 화장실도 집 안에 있었다. 난 이 집에서 거의 15년을 넘게 살았다.

 



당시 우리 집 사진.지금 생각하면 넓지 않은 집이었지만, 처음 만들 당시엔 저 집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집 같았다.  

유일하게 내 하드에 남아 있는 식당의 부엌모습. 저 정면의 문을 열고 나가면 화장실이 있었고, 지하로 가는 길도 있었다.

중고등학교, 대학교의 모든 추억은 이 집에 있다. 우리가 처음 키우던 강아지 그림이는 이 집이 세상의 전부였다. 3, 하지도 않는 공부 한다고 독서실에 앉아 있다 새벽에 들어오면 모든 식구는 다 자고 있어도, 그림이는 언제나 날 반겨주곤 했다. 그림이는 이 집에서 죽었다. 군대를 간 것도, 첫 휴가를 온 것도, 모두 이 집이었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다른 일을 못하시던 아버지가 계산대를 지키고 있던 것도 이 집이었고, 쓰러지신 것도 이 집이었으며,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집도 바로 이 집이었다.

 

내 침대 위에서 찍은 그림이 사진.-그림처럼 이쁘다고 '그림이'라고 불렀다.


오래 살던 동네이니 사람도 많이 알았다. 학교를 멀리 다녔던 나야 또래 친구 몇 명 아는 것이 전부였지만, 그곳에서 가게를 오래 하던 어머니는 동네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무서워하던 아저씨도, 우리 어머니를 누나라고 부르며 잘 따랐고 심지어 술을 마셔서 취하면 그만마시라는 어머니의 호통에 움찔하여 자리를 뜨곤 했다. 그리고 그 아저씨는 다음날 어김없이 찾아오곤 했다.

 

앞집은 외삼촌 공장에서 오랜 기간 공장장으로 일하시던 분들이 살았다. 나에게 그분들의 호칭은 공장장 아저씨공장장 아줌마였다. 우리 어머니와 공장장 아줌마는 쉽게 맞을 수 없는 성격이었고, 실제로 조금 안 맞는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힘든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찾아와주고, 도와주고, 안타까워해주고 했던 분도 바로 그 서로였다. 어린 나이에 가끔 눈에 보이지 않는 갈등을 하기도 하는 서로가, 또 이렇게 다정할 수 있을까?란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것이 어렴풋하게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하다.

 

우리집 옥탑방에 사시던 아주머니도 기억에 남는다. 그 아주머니는 위에 산다고 해서 윗집 아주머니로 불렸다. 나야 사연은 다 알 수 없지만 혼자 사시던 그 아주머니는 나와 내 동생을 유독 아꼈다. 내가 대학 졸업할 때 친척들도 해주지 않았던 금반지 선물을 해준 것도 윗집 아주머니. 그 밖에 내가 이모로 불렀던 2~3분이 더 계셨다. 난 지금도 그 이모들의 이름을 모른다.

 

골목과 공터는 놀이터였다. 그곳에서 놀다보면 하루가 금방 지나갔다. 중학교 3학년이 되며, 그래서 학원을 다니게 되며 골목과 공터는 나에게서, 그리고 우리에게서 멀어졌지만, 눈을 감으면 골목의 풍경뿐 아니라, 그곳의 냄새와 소리까지 생생하다.

 

이젠 그곳에 가면 그 중 누구도 없다. 어떤 건물도 남아 있지 않다. 


이삿날, 왼쪽이 내방, 오른쪽이 동생방이다. 동생은 당시 천안에서 생활하고 있어 동생방은 창고처럼 사용됐다.



어젯밤 꿈에 내가 살던 동네가 나왔다. 이 동네는 나에게 고향인 셈인데, 자고 일어나니 슬퍼지고, 아련하여 이 글을 쓴다





동네의 길이다. 오른쪽이 우리집


집에서 찍은 사진..


새벽.. 아마도 출근길에 찍은 사진(박물관 다닐 무렵)


저 길을 걸어 나오면 이런 큰 길과 마주한다. 하지만 이 길 역시 당시 새로 확장 된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