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4개 도시 여행기_나폴리_셋째 날_카프리 섬 이야기
카프리섬의 모습 - 왠지 첫 사진이 중요한 듯하여..
카프리는 캄파냐 지방에 있지만 캄파냐 지방이 아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아르떼카드 캄파냐를 전혀 쓸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비싼 돈 주고 샀더니.. 뭐 좀 실망스럽긴 했지만 일단 카프리를 둘러보러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카프리는 선착장을 중심으로 두 개의 봉우리가 있다. 선착장에서 도착하여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아나 카프리, 왼쪽으로 가면 그냥 카프리, 뭐 이런 지형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오전에 엄청 경치가 아름답다는 푸른 동굴로 향했지만 내가 보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다. 티베리우스의 별장인 ‘빌라 요비스(Villa Jovis)였다. 하지만 일단은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 카프리의 전경을 보기로 했다. 오늘 날씨는 매우 맑았으니까.
버스를 타려고 기다리는 데 어제 포지타노에서 나에게 우산을 씌워줬던 남자가 눈에 띄었다. 그는 숙소에서 만난 듯 한 한 여성과 같이 카프리에 왔다. 반가운 마음에 아는 척 하려고 했지만 작은 버스는 이미 가득 차 있었고, 그를 부르기엔 사람이 너무 많았다. 버스는 아주 작았는데, 높은 곳을 복잡한 커브가 있는 경사면을 따라 올라가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생각 됐다.
카프리 섬의 작은 버스
올라가는 동안 할 일이 없어 그 남자 쪽을 바라봤는데, 작업에 성공한 것인지 타지에서 만난 한국인에 대한 반가움인지 두 남녀는 매우 즐거워 보였다. 그것을 보고 ‘아.. 아는 척 하지 말아야겠다.’라고 생각했다. 어느덧 내려야 할 곳에 도착했다. 난 먼저 달아나려 했지만, 그와 눈이 마주쳤다. 조금 어색하게 “안녕하세요?, 여기서 또 보네요.”라고 말했다. 그 역시 “안녕하세요? 이렇게 또 보네요.”라고 답했다. 그러며 옆에 있는 여성에게 나를 간단히 소개했다.(그래 봐야 어제 만난 사람이었다고)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난 “전 케이블카 타고 전망대 가보려고요”라고 말했다. 그는 고맙게도 나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아.. 저희는 다른 곳부터 가보기로 했는데..” 그가 말했다. 난 그의 말에 냉큼 “아~ 아쉽네요. 다음에 또 볼 수 있으면 봐요”라고 말하고 헤어졌다. 어색한 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카프리의 가장 높은 곳으로 가는 케이블카를 탔다. 눈으로 얼핏 봐도 걸어서 왕복할 거리는 아니었기에 왕복 티켓을 샀다. 케이블카는 1명씩 타게 되어있어 커플이건 단체건 홀로 타는 즐거움을 느끼게 해준다는 점에서 썩 마음에 들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도 탈만했다. 떨어졌을 때 반쯤 불구가 될 만한 부분은 많아도 생명을 잃을만한 구간은 그리 길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올라가면서 보는 카프리의 경치는 불구가 될 수 도 있는 두려움을 잃게 할 만큼 아름답기도 했다.
케이블카를 오르며 찍은 카프리 섬의 모습
드디어 전망대에 도착했다. 전망대에서 본 카프리는 왜 티베리우스가 이곳에 별장을 마련했는지를 단번에 설명했다. 잔잔한 지중해 바다와 깎아지른 듯한 신비한 카프리의 지형이 만들어내는 광경은 말 그대로 절묘했다. 그때 한 팀의 동양인 여성 세 명이 보였다. ‘한국인인가?’라고 생각하고 ‘말을 걸어 볼 까?’ 마음도 먹었는데 일본인이었다. ‘뭐 일본인이면 어때? 다시 말을 걸어볼까?’도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내 형편없는 일본어 실력이 발목을 잡았다. 내가 그렇게 망설이는 사이 그 셋도 나를 의식한 듯했다. “저 사람 일본인인가?” “아니. 일본인은 아니야” “그럼?” “내가 보기엔 한국사람 아니면 중국 사람인데, 아마도 한국사람 같아” 이런 어디선가 들을 듯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국적 맞추기 게임이 전 세계인의 놀이임을 다시 확인하는 동시에 동아시아 사람들은 놀랍게도 서로의 국적을 구분하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은 시간이었다.
햇살이 너무 좋아 내 생애 가장 비싼 맥주를 마셔도 좋다는 생각이 들어 매점에 들어갔지만, 영업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랬다. 아직 성수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비수기는 포지타노 뿐만 아니라 캄파냐 지방 전체가 성수기를 준비하는 기간이었던 것이다. 맥주까지 마실 수 없게 되자 할 일이 없었다. 여행 중 처음으로 누군가와 동행했어도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부질없는 일이었다. 결국 난 내려가는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올라오는 사람도 늘고 있었고, 무엇보다 물 등 각종 물품이 본격적으로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카프리섬 전망대에서 본 절경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갔다. 올라 올 때와는 다르게 여유가 생겼다. 올라오는 사람들과 웃으며 인사도 나눴고, 조금 더 여유롭게 카프리의 변하는 풍경을 보고 사진도 찍었다. ‘오길 잘했어’란 생각이 나도 모르게 들었다.
내려가는 사람, 올라가는 짐
내려오면서 찍은 카프리섬의 모습
내려와서 티베리우스의 별장인 빌라 요비스로 향했다. 아까 전망대에서 느낀 기분 때문인지 왠지 혼자 식당에 앉아 밥을 먹을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가게에서 간단히 빵과 우유를 사서 먹으며 걸어서 – 버스가 갈 수 없는 곳임으로 - 빌라 요비스로 향했다. 낮은 담장이 만들어내는 묘한 분위기의 길은 제주도 같으면서도 다른 느낌을 주었다. 경사가 완만하여 걷기도 좋았고, 곳곳에 의자가 있어 힘들면 언제든 쉴 수 있게 해주는 배려도 좋았다. 그렇게 오르는데 한 이탈리아 남성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남성 : 혹시 빌라 요비스 가?
나 : 어 맞아
남성 : 나 여기 주민인데 확실하진 않아도 공사 하는 것 같던데?
나 : 그래? 그럼 문을 안 여나?
남성 : 그럴지도 몰라
나 : 고마워
남성 : 천만해. 즐거운 여행해~
‘헐.. 난 카프리를 빌라 요비스 때문에 왔는데..’ 갑자기 생각이 복잡해졌다. ‘돌아가야 하나? 아니야 앞에까지 가보면 무슨 수가 생기지 않을까?, 어제처럼 고생만 하는 거 아냐?’ 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러면서 일단 빌라 요비스 방향으로 걷고 있었는데 이번엔 젊은 여고생 두 명이서 말을 걸었다.
여성 : 혹시 빌라 요비스 가?
나 : 어 맞아
여성 : 우리 거기 갔다 오는 길인데, 문 닫았어.
나 : 헐..
여성 : 아에 아무것도 못 봐. 돌아가는 게 좋을걸?
나 : 휴. 그래야겠네. 고마워 알려줘서.
여성 : 천만해. 즐거운 여행해~
나 : 너희들도 즐거운 여행해~
난 결국 발길을 돌렸다. 티베리우스 별장 빌라 요비스는 전망대에서 본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그러며 걱정이 시작 됐다. ‘이제 뭐하지?’ ‘나폴리로 돌아가 박물관을 볼까?’ 다시 이런 걱정을 하며 항구로 향했다. 항구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데 내 뒤로 사십대 중년 커플이 줄을 섰다. 그리고 그들은 뽀뽀를 시작했다. 거짓말이 아니라 200번은 ‘쪽’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넘었을 수도 있다. 20분 넘게 그들은 뒤에서 뽀뽀를 했다. 하지만 여느 커플과 같이 그들의 행위가 기분 나쁘거나 하진 않았다. 오히려 부럽고 좋아보였다. 카프리의 경치가 사람의 마음을 넓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발치에서만 봐야했던 빌라 요비스
버스를 타고 항구로 오니 배시간이 1시간 30분이나 남았다. 표를 사고 식당에 가서 맥주를 시켰다. 그리고 햇살이 잘 비치는 테이블에 앉아 카프리에서의 일을 정리했다. 맥주는 금방 사라졌다. 아식 시간은 많이 남았고. ‘또 뭘 시킬까?’ ‘그러기엔 돈이 아깝지 않나?’ 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결국 아직도 많이 남은 배 시간 때문이라도 다시 직원을 불렀다. 약간은 벌벌 떨며 작은 와인 한 병을 시켰다.
당시에 시켰던 와인, 그리고 앉았던 테이블
그리고 내 생애 가장 평온한 시간이 시작됐다. 그 당시 쓴 노트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내 평생 가장 평온한 시간을 지내는 중이다. 바닷가 노천카페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이런 글이나 끄적거린다니! 어차피 돈 쓰러 왔으면서 왜 이리 벌벌 떨며 돈을 아끼는지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거 다 마시고 와인도 마셔야지. 왜 이리 나한테 아끼며 사는 게 습관이 됐는지. 한국 돈으로 따져봐야 3만원 될까 하는 돈에 벌벌 떠는 모습이 내가 봐도 안쓰럽다. 매년 여행 가자고 했지만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고, 내 평생 또 언제 있을지 모르는 일 아닌가? 차비 말고 쓴 돈이라곤 물하고 빵 산 것 밖에 없는데.. 뭘 이리 하나 더 본다고 아웅다웅 했는지.. 역시 이런 것도 삶에 대한 자세였던가 싶다. 배 시간을 알아보지 못해 처음 휴가처럼 시간을 보낸다. 와인 반병을 시켰더니 9.5유로. 그림자가 내 테이블을 덮으니 자리도 햇볕이 있는 곳으로 옮겨준다. 와인과 함께 안주도 준다.”
그 밑에는 “뭘 열심히 보지 않아야 쉴 수 있다”는 메모도 있다. 카프리 해변에서 취할 때까지 와인을 마셨다. 마침 그때 우연처럼 연필이 테이블 밑으로 떨어져 심이 부러졌다. 글도 더 쓸 수 없었다. 그렇게 취해서 햇살과 술과 경치를 마음 것 즐겼다.
배 시간이 되어 항구로 가 배를 탔다. 이번엔 고속 페리였다.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고속 페리는 운치가 없었지만, 난 이미 취해서 밖으로 나갈 생각도 없었다. 한 무리의 한국 관광객들이 같은 배에 타서 서로 같이 앉으려 조금 소란스러웠지만 난 자리를 잡고 그냥 잠들었다. 그리고 잠에서 깨니 나폴리였다. 난 걸어서 숙소로 들어오며 전에 먹었던 그 피자를 또 샀다. 그리고 카프리에서의 깨달음(?)으로 더 뭘 본다는 생각도 없이 피자를 먹고 씻고 휴식에 들어갔다. 여행을 와서 처음 맞는 휴식 같은 휴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