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효율적인 설득의 방식은 합리인가?
근대가 무엇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그것을 설명하는 여러 단어 가운데 하나로 흔히 ‘이성’과 ‘합리’를 이야기한다. 여기에는 그 이전의 시대가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이지 않았다는 의미가 담겨있고, ‘식민지 근대화론’에 담겨 있는 함의에 비추어 보자면 ‘근대는 그 이전 시기보다 더 나은 시기’라는 의미도 담겨 있는 듯하다. 하긴, 생각해보면 이성과 합리의 시대라는 근대에 접어들며 과학과 기술이 발달했고, 인류의 생산성이 크게 증가 하여 굶주림을 면하게 되었고(물론 아직 절대 빈곤에 놓여 있는 수십억의 인구가 있지만), 의학의 발달로 수명이 크게 늘었으니 근대는 어쩌면 예찬 받을만한 시대인지도 모른다.
이런 이성과 합리의 연장선에서 한때 인간을 연구하는 인문학이 ‘인문과학’으로 불리던 때도 있었다. 인간의 행위를 과학적 방법으로 분석해보자는 것이었다. 이래서는 인문학이 사회과학과 구분이 잘 가지 않게 되기도 하겠거니와, 인간이 그리 합리적이고 이성적이지 않기 때문에, 그 행위를 ‘과학적’으로 분석하기에는 한계가 있어 ‘인문과학’은 다시 인문학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마찬가지 의미에서 사람을 설득하는 방법에 있어 합리와 이성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인지 고민하게 된다. 최근 선거를 보면 흔히 말하는 ‘계급배판투표’ 현상이 많이 일어나고, 이에 대한 수많은 해석도 있다. 그 많은 해석을 내가 다 아는 것도 아니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대부분 수긍이 가는 이야기들이다.
문제는 ‘계급배반투표’를 하는 사람을 계급의 이익에 맞는 투표를 하게 설득할 수 있는가?이다. 이들에게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설득을 한다고 이들의 지지정당이 바뀔 수 있는가? 이렇게 생각하면 대부분 ‘그렇지 않다’라는 결론을 내릴 것이고, 그 기저에는 ‘그들은 논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라는 생각이 깔려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인간을 설득하는 방식으로 ‘합리’와 ‘이성’은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었나?라는 의문이 든다.
인도에서 소를 먹지 않는 궁극적인 이유는 소를 먹기 시작하면, 인도의 경제, 특히 중소 농민의 경제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도(힌두교)에서는 사람들에게 소를 먹지 않게 하기 위해 논리나 이성적인 방법으로서의 설득을 택하지 않았다. 그들이 택한 방법은 바로 종교였다. 힌두교는 ‘소는 신성한 동물’이라고 규정했고, 그랬기에 힌두교를 믿는 사람들은 소를 먹지 못하게 되었다. 이슬람이 돼지를 먹지 못하게 하기위해 선택한 방법 역시 종교적인 접근이었다. 이슬람은 힌두교와 다르게 돼지를 ‘더러운 동물’로 규정해서 돼지를 먹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 두 종교는 소와 돼지를 먹으면 안 되는 합리적인 이유를, 비합리적인 방법을 통해 사람들을 설득했다. 합리적인 설득이 아니었기에 배고프고 굶주릴 때, 소와 돼지를 먹을 수 있는 ‘합리화’도 불가능했다.
이런 믿음과 관습에 의한 설득 방법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지 않고, 따라서 보편적이지도 않지만 특정 집단에게는 가장 효율적이고 확실한 설득의 방법이다. 합리의 시대인 근대에 이런 방법은 ‘비합리적’이라며 폄하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인구의 대략 50%정도가 종교를 가진 한국에서 ‘비합리’적 설득 방식은 아주 효과적일 수 있으며, 폄훼될 이유도 없다. 따지고 보면 투표의 대부분은 ‘경제 건설의 신화’나 북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증오’ 따위에 의해 결정되지 않았던가?
합리적이고 이성적이지 않은 믿음을 가진 사람을 합리와 이성으로 설득하려 하지 말자. 무시하지도 말자. 그냥 원래 인간은 그런 존재 아니던가.
합리와 이성에 대한 환상은 이미 곳곳에서 깨지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인간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존재라는 믿음은 버리기 어려운 명제인 듯하다.